견지

국밥에 대하여

기도하 2025. 1. 22. 20:57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사실관계는 다른 자료를 통해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밥은 단순히 국에 밥을 말아 먹는 음식이 아니라, 한민족의 독특한 생활양식과 조리 방법에서 비롯된 음식이다. 수질이 좋고 찰기 있는 밥을 먹는 문화가 국과 어울렸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면 일본도 국밥 문화가 발달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일본의 "곁들이는 국"과 한국의 "국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밥은 본래 밥과 국이 섞여 나오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 까닭을 살펴보면, 한민족의 독특한 주거 방식과 요리 도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한민족은 온돌이라는 난방 기구를 사용했고, 이 온돌의 아궁이를 통해 음식을 조리했다. 온돌은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된 한민족 고유의 생활방식이었다. 이러한 온돌 문화는 단순히 난방뿐 아니라 음식을 준비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온돌의 아궁이에는 가마솥이 올려졌고, 이 가마솥은 한민족의 모든 요리를 가능하게 했다. 무쇠로 만든 가마솥은 고려 시대 이후 본격적으로 사용되었겠지만, 솥 자체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가마솥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며, 푸성귀를 데치는 과정이 아궁이 하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리의 효율성이 중요했다.

조선 시대의 식단은 현대 한국인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밥, 장, 젓갈, 절인 야채(김치) 정도가 기본이었다. 특히 식량으로 쌀과 소금이 필수였으며, 반찬으로는 장과 젓갈, 말린 생선, 말린 푸성귀가 주를 이루었다. 김치는 조선 후기까지도 흔하지 않았으며, 배추 한 근의 가격이 쌀 두 말과 맞먹을 정도로 귀했다. 따라서 김치는 주로 부유층에서 소비되었다고 봐야 한다. (조선인들은 상추도 거금을 들여 먹었다. 상추 씨앗은 귀했으므로 천금채라고도 불렀다. 쌈문화가 이르게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을텐데도!) 

소고기가 국밥에 들어가기 시작한 시점은 조선 후기로 추정해야 하지 않을까?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조선의 소 사육 두수가 100만 마리를 넘었고, 이 시기에야 소고기나 뼈가 국밥에 활용될 여지가 생겼다. 돼지는 그보다 더 희귀했고, 꿩 사냥은 아무나 하지 못했으며, 닭은 알을 낳는 가축이었으므로 고기로 쓰이기 어려웠다. 말린 푸성귀와 함께 소고기 국물이 더해지며 국밥의 형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국밥 문화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토렴"이다. 토렴은 찬밥을 국물에 넣었다 뺐다 하며 밥을 데우는 과정인데, 이는 아궁이 하나만 사용하는 식당 환경에서 자연스레 등장한 조리 방식이었다. 가마솥 하나로 밥과 국을 동시에 끓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국밥의 밥은 항상 식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따로국밥은 상대적으로 더 높은 가격이 책정되었는데, 이는 따뜻한 밥을 아랫목에 준비하는 추가적인 노력 때문이었다.

현대 국밥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펄펄 끓는 뚝배기 국밥은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다. 뚝배기를 불에 달구어 내놓는 방식은 근래에 등장한 방법이다. 전통적인 국밥은 토렴하는 손이 뜨겁지 않을 정도로 미지근하다. 양반들의 음식은 더 미지근했는데, 이는 양반들이 사용하던 놋그릇의 특성과도 맞물린다. 놋그릇은 비열이 높아 국물의 온기를 빠르게 빼앗기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맛을 가장 잘 느끼는 온도는 체온과 비슷한 온도이다. 펄펄 끓는 국은 오히려 맛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펄펄 끓는 국밥보다는 은은한 온기의 전통적인, 더욱 더 부귀한 사람이 먹을 것 같은 국밥을 선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