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의 유예
어떤 논쟁에서 가장 쓸모 없는 논쟁은 ‘유예를 위한 논쟁’이다. 그에 의하면 진리란 끝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영원불멸의 진리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진리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논쟁은 ‘이 또한 복잡한 사항이므로 우리는 값을 매길 수 없다’로 귀결된다. 그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 결과는 ‘영원히 우리는 알 수 없다.’가 될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결말은 많은 사람들이 ‘좀 더 면밀히 살펴 결정하도록 하자’의 식으로 결론 짓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굉장히 비열한 짓이다. 진리가 영원불멸할 수 없다는 점을 긍정하더라도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고 현재의 수많은 문제점들과 싸워 헤쳐 나가야 한다. 과거엔 그러하지 않았지만, 현재에는 그러하다. 과거엔 거짓이었지만 현재에는 참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충분 공감할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다. 설사 미래엔 거짓일지라도.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다. 만약 그가 문제의 결정을 유예시키려 든다면, 그는 현재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적어도 우리가 해결할 문제에 참여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현명하게 쟁점을 설명하고 값을 매기고 있는 행동을 취하더라도, 그는 우리의 문제와 동떨어진 사람이다. 이 쟁점에서 그를 마땅히 탈락시켜야 한다.
나는 가장 비열하다고 생각하는 자 중에서 ‘그래서 인생은 이렇게 복잡한 거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다.’고 결론 짓는 자를 혐오한다. 그는 우리가 쌓아온 모든 아카이브와 논쟁을 하나의 문장으로 무너뜨리려고 시도한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논쟁하고 정보를 모으고 참거짓을 가르고 접고 자르고 다듬어온 업적을 당신이 감히 ‘이런 거 쓸모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도 우리가 명제화 한 것들에 일일이 옳고 그름을 따졌으면서?
내가 이 문제의 결론을 유예시키지 말아야 할 첫번째 이유라면 바로 이것은 바로 나에게도 봉착한 문제라고 공감하는 것이다. 문제는 해결불가능이므로 넘기겠다고 결론 짓는 것은 내가 전처럼 사는 것이 좋다고 인정하는 꼴이다. 굳이 ‘이건 너무 복잡해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다’고 선언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그냥 해결할 생각이 없다. 애써서 각 사안들의 모순점을 지적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당신은 그 모순점들 때문에 문제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뿐이다. 파도가 밀려오는데 왜 조개나 줍고 있냐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결론 짓고 행동해야 하는가? 만약 과학적 탐구의 과정이라면, 문제의 제기와 함께 문제의 값을 매겨볼 수 있는 장치나 계산 방법을 함께 찾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장치나 방법을 제안하면 그 방법에 따라 문제를 측정할 것이고 값이 튀어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값을 통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삶의 문제라면 그렇게 도달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값을 측정할 도구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개인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문제가 될 테니까. 모든 시도가 평가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삶의 문제이기 때문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감히 문제를 유예시키려는 행위가 쉽게 등장한다.
하지만 또 놀랍게도 우리는 전체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개별 명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 모든 문제의 가치를 묶어서 평가할 필요도 없다. 각자 모두에게도 잘잘못이 있다. 충분히 지적 받을 수 있으며, 그 사항에 대해서 일일이 정의로움으로 포장할 필요는 없다. 문제를 개별화하여 구분 지을 수 있으며, 또 개별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특히 개인의 문제라면, 내 자신과 관련된 문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에게 봉착한 문제라면 즉시 나의 행동도 지적 받아 고칠 수 있다. 이것을 절대 ‘유예’ 시켜선 안된다. 이 문제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모두의 문제이고, 너와 나의 문제이며, 즉시 내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이다. 사태를 미스터리로 만들어 ‘너도 모르지 않냐’의 결론을 내리지 말아라.
폭력성
폭력성이 담긴 시위에는 충분히 인정 받을 만한 ‘대의’가 있겠지만, ‘대의’ 그 자체로는 절대로 폭력성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폭력성’에 대한 부분은 법으로도 지정되어 있으며 거의 모든 시위자들은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시위에 참가한다. 그리고 ‘폭력이 아니면 사람들이 우리 시위를 보지 않는다.’고 변명한다. 그 변명은 맞다. 그리고 어떤 누군가에게는 물리적 피해나 재산의 피해를 안겼다. 그에 대한 처벌이 있을 수 있다.
이 때 논의되어야 할 점이 ‘폭력성’이냐? ‘대의’냐? 법에게 올바른 판단을 기대하는 행동에 대해 지금은 말하지 않겠지만, ‘폭력성’에 대한 처벌은 ‘법’에게 충분히 기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쟁을 ‘대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특히 개인이나 사회가 겪는 폭력을 기준으로 ‘대의’를 평가하는 것은 쓸모 없는 오용이다. 만약 어떤 사회가 어떤 병을 앓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런 ‘대의’가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고, ‘대의’가 묻히지 않기 위해 ‘폭력성’이 출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폭력’은 절대로 정당하지 않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룰 것이다. (혹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폭력의 처벌은 온전히 피해를 받은 사람과 준 사람의 문제이다. 만약 피해를 받았다면 법의 도움을 받아보라.) ‘대의’를 평가하는데 ‘발화자의 ‘도덕성’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대의를 알리기 위해 법적인 엄청난 피해를 감수한다. 사회에 끼친 막대한 손실을 보상하느라 인생을 송두리째 날린다. 그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도 운이 좋게도 법망을 피해갔다면 사회의 손실과 개인적 피해에 대한 단죄를 논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의’와 그 안타까운 사건은 개별 사건이다. 어떤 누군가가 못살겠다 생각하고 흉악한 범죄를 일으킬 수 있지만, 흉악한 범죄였다고 ‘못살 정도의 사회’를 가려선 안되는 것이다. 대의는 마땅히 드러나야 하며 논쟁해야 한다. 대의 가운데에는 우선시 해야 할 많은 개별 사항들의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도덕 윤리적 문제를 감수하고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폭력적인 시위를 선택한다. 대개 폭력적인 시위부터 선택하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 주변에게 도움을 청해본 후에 모든 시도가 좌절되면 그 때서야 범법행위에 눈을 돌린다. 더욱 폭력적이고 범법적일수록 그의 이전 시도가 모두 무참히 좌절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폭력은 정당할 수 없다. 폭력행위를 시도하거나 가담한 자들은 사회에 끼친 피해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범법자들이 행동한 이유와 대의를 그들의 폭력성으로 우리의 눈을 가리면 안된다. 폭력성을 젖혀 두고도 우리는 충분히 개별 명제에 대한 참 거짓을 가려낼 수 있다.
의견
그렇다면 좋은 의견은 무엇일까? 바로 나 자신의 이익과 내가 가진 혐오로 말미암아 이러저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돼지발정제의 문제를 충분히 인지하고도 홍XX 후보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될 테니까.’ 바로 이러한 답변이 100점 만점의 의견이다. 개인의 욕망을 사회적 거시적 현상에 의지하지 않고 드러내면서 결론을 이끌어 낸 올바른 케이스다. 나는 이러한 의견을 낸 사람에게 아무런 악감정을 가지지 않으며 오히려 의견 도출 과정에 동의한다. 그는 그런 선택을 충분히 할 수 있다. 다만 가치 평가 방법에 대해 논의해볼 수 있겠다.
나쁜 의견인 무엇인가? 바로 개인이 내린 결론과 의견에 사회적 형편이나 도덕성, 보편적 윤리, 전통, 사회적 낙인 등을 덧붙여(희석시켜) 변명하는 의견이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문XX 후보를 빨갱이라고 부르잖아.’ 따위의 말이다. ‘옛날부터 사람은 이러 저러 했다.’ 라고 이야기 하는, 내 의견을 의지하는 곳이 논쟁과 다른 어떤 차원에 있다. 이러한 사람은 같은 운동장에서 논쟁할 수조차 없다. 그는 문제에 동참하지 못한다. 논쟁하기 위해선 머나먼 곳을 함께 다녀와야 한다.
가장 나쁜 의견은 바로 의견을 내지 않는 동시에 먼 길을 떠나게 하는 말들이다. ‘그녀는 메갈이야’라고 하는 말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더더욱 먼 길을 돌아가게 만든다. 그의 말은 마치 자신의 가치 판단이 안 들어간 것처럼 의견이 아닌 것처럼 그 말을 던지겠지만, 사실 명백한 자기의 의견을 비판 받지 못할 영역으로 숨기려는 행위다. 마치 ‘그는 빨갱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회적 낙인을 비열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메갈이니 빨갱이니 하는 낙인을 찍는 행위가 옳고 그르냐는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길 바란다.) 왜 빨갱이가 나쁜지, 왜 메갈이 나쁜지에 대해 오랜 토론을 해야 한다. 게다가 왜 그 카테고리의 의견이 나왔는지에 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원래 질문이나 논쟁의 주제에서도 멀리 떨어져 나온다. 애써 먼 길을 다녀오는 동안 ‘낙인 찍은 자’는 왜 이런 논쟁을 하는지 잊어버린다. 이렇게 되면 으레 ‘정치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나 ‘내가 싫다는데’ 등의 인간 관계와 취향 문제로 사태를 덮으려 하기 마련이다.
‘빨갱이’라도 ‘메갈’이라도 그가 하는 말이 맞을 수 있다. 낙인을 찍으며, 퉁 치며, 카테고리화 분류하며 명제의 옳고 그름 판단을 희석시키지 말아라. 개별 사항의 가치판단을 유보 시키지 말아라. 사태의 폭력성, 발화자의 도덕성을 참여시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명제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 낙인은 발화자를 모욕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너 일베냐?’ 하는 등의 말은 욕설이다. 문제를 제시한 사람을 비정상으로 생각하는 집단으로 카테고리화화 하며 깔아 뭉개려 시도하는 것이다. ‘일베’가 나쁜 집단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너 한남이냐’라고 묻는 것과 동일하다. 논쟁이 아니라 욕설을 하겠다는 말이다. 이건 의견이 아니다.
어떤 흉악한 범죄자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주장했다. 그 범죄자는 처벌받아야 할 마땅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말도 안되는 허언으로 몰아 부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무력하단 사실을 염려해야 한다. 이 염려를 두고 ‘비열한 범죄자가 한 말이다’라고 말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비열함과 나태함의 사이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망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만약 답변하기 곤혹스러운 처지에 있는 질문은 당신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개인적인 질문이라면 사정에 의해 그에 대한 답변을 회피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곤란할수록 당신과 맞닿아 있는 문제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의 안락함에서 빠져나가기 싫기 때문에 듣기 귀찮아 하는 태도도 갖고 있겠지만 말이다.
가장 비겁한 행위는 판단을 유보시키는 행위이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며 ‘당신들이 주장하는 것에 대한 폐해가 여기 있다.’라며 물타기를 하는 행위가 비겁한 것이다. 또한 ‘당신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극악무도한 어떤 집단의 주장과 닮아 있소.’라고 낙인 찍는 행위가 비겁한 것이다. 이 주장들은 모두 논쟁에서 빗겨 나가며 결론을 지연시키려는 비열한 행위와 다름 아니다.
‘당신 이 연구하는 연구는 이미 실패한 소비에트 연방(소련)에서 연구하던 내용이므로 가치가 없소’ 이와 같은 말이 도대체 어떻게 논리적이란 말인가? ‘당신 연구는 극악무도한 나치가 연구했던 것이오.’ 이게 어떻게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대개 답변을 속 시원하게 못하는 경우는 그가 문제 발화자의 처지도 십분 이해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위치와 서로의 관계를 유지시키고 싶을 때 발생한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몰리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서로 얼굴을 볼 수 없으며,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스스럼 없이 욕설을 하고 낙인을 찍고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자신이 사회적 명망에 있는 익히 잘 알려진 사람이거나, 상대방과의 돈독한 관계가 이미 있을 경우엔 욕설 후 회피하는 행동이 매우 곤란하다. 이 때 ‘판단의 유예작전’은 기가 막히게 들어간다. 낙인을 사용해 최대한 논쟁의 초점을 멀리 돌려놓고, 누군가 모든 유예 시도를 뚫고 강하게 비판하면 나태함으로 감추는 것이다. 나태함은 비열함보다 대가가 싼 편이니까.
발화자들은 대개 많은 용기를 낸다. 폭력성도 듣는 사람들 보다 앞서 염려한다. 관계가 끊어지거나 사회적 명망이 파괴될 것을 감수하는 쪽은 발화자들이다. 발화자들은 폭력성으로 지적당하며 낙인 찍히는 등의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한다. 자신을 불구덩이 속으로 내던진다. 그 위험만큼 그가 시작하는 논쟁은 매우 그와 밀접하고 생존과 맞닿아 있다. 바로 파레이지아다.
듣는 사람들은 비열하다. 발화자는 위험을 감수했지만, 듣는 사람은 위험을 회피한다. 발화된 토론의 주제가 불편하다. 문제의 핵심을 비켜 빙빙 둘러댄다. 비교적 논리정연하고 정의로운 척 사람이라면 문제의 복잡성을 강조하며 문제 판단을 유예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럴 재주가 없다면 마지막에 나태함으로 포장한다. 그들은 절대로 정의로울 수 없다. 비겁한 자들이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스스로 솔직하게 비겁해지면 된다. ‘나는 내 신분으로 얻는 사회적 이점을 영위해야겠다.’라고 이야기하면 된다. 그럼 비로소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 정의로운 척 하며 상대방의 처지를 아울러 생각해주는 척 하지 말아라.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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