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시대정신을 '자신이 포함된 새로운 조류'라고 이야기 한다. 이미 자신들이 주류가 되고 체제가 되었음에두 불구하고 여전히 시대정신은 그들 자신이다. 만약 그런 것이 시대정신이었다면 박정희 정권을 찬양하던 사람들도 시대정신이었다. 그런건 더도 덜도 말고 그냥 자신의 세대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 (헤겔의 시대정신은 그 시대가 끝나야 알 수 있는 것으로, 엄밀히 말하면 시대정신의 후보쯤 되는 것을 꼽을 수는 있어도 자신들이 시대정신이라고 참칭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한편으로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체제에 흡수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자세를 취한다. 시대의 잘못을 찾아내고 아무리 유리한 주류와 대세가 있더라도 그저 쫓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동시대인이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을 통해 "이 고찰이 반시대적인 것은 시대가 자랑스러워하는 역사적 교양을 내가 여기서 시대의 폐해로, 질병과 결함으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며, 또 심지어 나는 우리 모두가 소모적인 역사적 열병에 고통을 받고 있으며, 적어도 우리가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밝힌다. 롤랑바르트는 이를 두고 "동시대인이란 반시대적 자아이다."라고 요약하고 있다.
동시대성은 현재의 시간과 단절되는 시간을 갖는다. 현재에 들러붙어 관계하되 시차와 시대착오를 함께 맺는 관계이다. 시대와 완전히 일치한 사람은 시대를 보는 데 이르지 못하고 시대에 보내는 시선을 고정할 수 없다. 동시대인은 시대와 조금 떨어져 세기의 빛에 눈멀지 않고 내밀한 어둠을 식별하는 자이다.(참조)
그러나 그 어둠은 아직 우리에게 닿지 않는 멀리 있는 별과 같다. 반시대성, 시대착오, 너무 빠르거나 너무 이른 형태로 다가온다. 시대와 어긋나 있는 자의 시간은 현재의 시간에 있는 자들과 다르게 간다. 때로는 시대착오적 인간이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유행이 뒤따라 가기도 한다. 이런 까닭으로 동시대성은 때론 유행을 선도한다. 그러나 현재 유행과는 서로 다르다.
대세는 동시대성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현재에 와 있는 것이고 닿아 있는 것이다. 주류와 유행은 체제이다. 이것은 니체의 말에 따라 '시대가 자랑스러워하는 역사적 교양'이다. 이는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을 하기 원하는 현실인 것이다. 교양을 시대의 폐해로, 질병과 결함으로 이해해야 한다. 모든 시대에는 핍박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으며 조금만 떨어져 둘러봐도 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체제가 되길 원한다.(체제는 전통, 가족, 회사, 사회 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체제가 된 사람은 체제에 순응하지 못한 사람을 비판하거나, 아직 체제에 합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언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들은 체제에 들어서기 전에 맞닥뜨려야 했던 현실의 불합리성과 체제의 결함을 선선히 인정한다. (그것이 체제에 들어서기 위한 조건인 건지 아니면 체제에 들어서게 되면 자연스럽게 비판의식이 사라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체제에 순응하는 것을 합리성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너무나 시대에 내밀하게 닿아 있어서, 세기의 빛에 눈이 멀어서 시대를 보는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헤겔이 말하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 시대정신이란 주류와 대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를 만들어낸 과거의 시대정신은, 과거엔 비주류였으며 반시대적이었다. 과거의 시대정신이 현재에 와서 주류가 되었다면 더이상 시대정신이 아니다. 주류는 다양성을 죽이고, 대세는 소수자를 억업한다. 이제는 구식의 시대정신이 체제가 되었고 질병과 결함을 가지고 있다. 어전히 새로운 시대는 어둡다.
참조: 조르조 아감벤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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